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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호사란 직업

간호와 육아 사이: 아동간호학 교수가 말하는 진짜 워라밸의 의미

by cooca78 2025. 6. 8.

간호사 엄마

간호사로 일하며 아이를 키우는 것은 단순한 다중 역할 수행을 넘어선 생존의 문제이기도 하다. 특히 간호대학 교수로서 강의, 연구, 실습지도, 행정까지 맡으면서도 엄마로서의 정체성을 지키는 일은 이론보다 훨씬 복잡한 감정과 현실의 균형을 요구한다. 이 글은 25년 차 임상과 교육을 아우른 간호사가 직접 겪은 삶의 균형 이야기를 바탕으로, 이상적인 '워라밸'이 아닌 실제 가능한 '생존 가능한 균형'의 조건들을 다룬다. 아동간호학의 눈으로, 엄마의 마음으로, 그리고 여성 전문직의 현실을 살아가는 입장에서 써 내려간 진짜 이야기다.

간호사 엄마라는 이중적 정체성, 그 무게와 의미

간호사이자 엄마, 그리고 교육자라는 세 가지 이름을 동시에 지닌다는 것은 생각보다 무겁다. 간호직은 그 자체로도 높은 정서적, 육체적 부담을 가진 전문직이다. 매 순간 생사의 경계에 선 환자들과 함께하며, 감정노동을 일상으로 겪어야 한다. 그러나 근무가 끝난 뒤에도 역할은 종료되지 않는다. 집에 돌아오면 '엄마'라는 이름으로 다시 시작되는 또 다른 근무가 있다. 아동의 성장과 정서 발달, 질병 예방과 건강 관리를 가르치는 간호학 교수로서의 직무는 아이를 키우는 데 큰 도움을 줄 것 같지만, 실상은 그 지식이 내 아이 앞에서는 자주 무력하게 느껴진다. 워라밸이라는 단어가 유행처럼 소비되는 시대지만, 간호와 육아를 동시에 수행하는 여성에게 있어 이 단어는 현실적이지 않다. 시간의 균형, 에너지의 분배, 정체성의 분열, 죄책감과 자존감 사이를 줄타기하는 날들의 연속이다. 아이가 열이 나는데 강의는 빠질 수 없고, 학생의 실습 태도가 문제인데 오늘은 학원 데려다줄 시간에 간신히 맞춰야 한다. 이상적인 균형은 없다. 다만, 그 균형을 매일 ‘다시 조율하며 살아내는 것’이 이중 역할자의 진짜 능력이다. 이 글에서는 실제 간호사로, 엄마로, 교수로 살아오면서 겪은 경험을 중심으로, 간호사 엄마들의 일과 삶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단지 시간을 쪼개 쓰는 기술이 아니라, ‘무너짐 없이 버티는 전략’을 나누고 싶다. 결국, 간호도 육아도 ‘케어(care)’라는 동일한 핵심을 가진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간호에서 배운 모든 가치와 태도는 아이를 기르는 데 그대로 연결될 수 있다. 균형은 완벽한 분할이 아니라, 우선순위와 진심을 담는 방식의 선택이다.

현실 속에서 가능한 워라밸의 조건: 기술이 아닌 태도의 문제

첫째, 시간이 아니라 에너지 중심으로 삶을 관리해야 한다.

간호사의 일정은 대부분 시프트 단위로 구성되어 있지만, 육아는 단일한 구조를 가지지 않는다. 그래서 시간 분할보다 중요한 것은 에너지의 배분이다. 하루에 두 시간이 있다 하더라도 온전히 집중하고, 그 순간만큼은 아이에게 ‘일하는 엄마’가 아닌 ‘함께하는 엄마’가 되어주는 것이 더 큰 안정감을 준다. 간호사로서의 집중력과 리더십은 가정에서도 효과적인 육아 전략이 될 수 있다.

 

둘째,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 능력이라는 인식 전환이 필요하다.

간호사들은 흔히 책임감이 강하고 자립성이 높은 성향을 지닌다. 그러나 이 성향이 육아에서는 독이 될 수 있다. 모든 것을 스스로 해결하려 하다 보면 지치고, 결국 번아웃에 빠지게 된다. 배우자, 부모, 동료에게의 도움 요청은 결코 약함이 아니다. 오히려 지속 가능한 균형을 위한 핵심 조건이다.

 

셋째, ‘완벽한 엄마’가 아닌 ‘일관된 엄마’가 더 중요하다.

간호학 이론에서 ‘신뢰감 있는 돌봄’이 강조되듯, 아이에게 필요한 것도 하루 종일 곁에 있어주는 완벽한 존재가 아니라, 항상 같은 기준으로 반응하고, 감정의 일관성을 유지하는 엄마다. 간호학에서 배운 피드백 기술, 감정 조절 훈련은 육아에서 큰 도움이 된다.

 

넷째, 아이에게 간호사의 삶을 공유하는 것은 교육이 된다.

아이에게 엄마의 직업을 숨기거나 업무 이야기를 차단하기보다는, 그 삶의 가치와 무게에 대해 설명해주는 것이 중요하다. “엄마는 오늘도 아픈 사람을 도왔어.”라는 말 한마디가 아이의 세계관을 넓히고, 역할 모델링이 될 수 있다. 또한, 엄마의 일이 단순한 생계유지가 아니라 ‘사람을 살리는 일’ 임을 알려주는 것은 아이에게 자존감과 존중을 가르치는 교육적 효과를 갖는다.

 

다섯째, 자기 연민이 아닌 자기 회복 루틴을 가져야 한다.

무조건 참거나, 반대로 자신을 너무 몰아세우는 것은 결국 감정적 탈진을 부른다. ‘괜찮다’는 말은 상황이 나아졌을 때가 아니라, 스스로를 인정할 때 사용할 수 있다. 간호사로서 감정노동에 익숙해졌다면, 이제는 자신을 치유하는 루틴도 만들어야 한다. 명상, 짧은 산책, 매일 10분의 독서, 또는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시간조차 필요하다.

 

이 모든 전략은 이론이 아니라 생존의 노하우다. 간호와 육아의 교차점에서 우리는 매일 흔들리고 있지만, 그 속에서 자신만의 워라밸을 조정하는 능력을 키워가고 있다.

간호와 육아는 공존할 수 있다: 진짜 워라밸은 선택이 아니라 방향

많은 이들이 워라밸을 마치 ‘이룰 수 있는 목표’처럼 이야기하지만, 간호와 육아의 현실을 살아본 이들에게 워라밸은 매일의 결심이고, 끊임없는 조정이다. 우리는 언제나 어떤 역할이든 잠시 멈춰야 할 순간과, 집중해야 할 타이밍을 판단해야 한다. 간호사이면서 엄마라는 이중 정체성은 결코 단점이 아니다. 오히려 그 안에는 풍부한 공감력, 빠른 상황판단력, 지속 가능한 리더십이 응축되어 있다. 아동간호학에서 강조하는 ‘발달에 적합한 돌봄’은 단지 환아에게만 적용되는 원칙이 아니다. 아이를 키우는 모든 엄마 간호사들에게도, 자신을 돌보는 데 필요한 철학이 된다. 우리는 자녀의 성장 발달만이 아니라, 자신의 삶도 ‘발달’시키고 있는 중이다. 그 발달은 단지 직책이나 연봉의 상승이 아니라, 자신과의 관계, 가족과의 유대, 삶의 밀도 속에서 이뤄진다. 진짜 워라밸은 멀리 있는 이상향이 아니다. 오늘 하루, 아이의 말에 눈을 맞춰주고, 실습 평가서 작성에 책임을 다하고, 밤에 누워 자신의 하루를 인정해 주는 그 모든 선택의 반복이다. 그러니 괜찮다. 오늘도 간호했고, 돌보았고, 살았다면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