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년 전, 새하얀 간호사복을 처음 입고 병원 복도를 걸었을 때의 떨림을 지금도 기억합니다. 수없이 반복된 밤 근무와 응급 상황, 지쳐 쓰러질 뻔한 순간들을 지나면서도, 나는 여전히 이 길 위에 서 있습니다. 왜일까요? 간호사는 단순한 직업이 아니라, 사람을 향한 책임과 신념이자, 나 자신을 지탱하는 삶의 이유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글은 25년 차 간호사로서 살아온 날들의 무게,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간호사로 남기로 한 진심 어린 고백입니다.
25년이라는 시간, 그 무게와 의미
간호사로 살아온 지 어느덧 25년. ‘지금까지 어떻게 버텼을까’라는 생각을 요즘 따라 자주 하게 됩니다. 처음 병원에 들어섰을 때, 나는 아직 스물셋이었습니다. 낯선 환경, 냉랭한 분위기, 빠듯한 업무 속에서 두려움은 컸지만, 그보다 더 컸던 것은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이고 싶다”는 열망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상과 현실의 간극은 생각보다 컸습니다. 응급실에서 환자의 갑작스러운 심정지를 마주하고, 고개를 떨군 보호자에게 사망 소식을 전할 때, 마음은 갈기갈기 찢어졌습니다. 수술을 마친 어린아이를 품에 안고 오열하는 어머니를 볼 때면, 한참 동안 눈을 감고 깊게 숨을 들이켜야만 했습니다. 간호사라는 직업은 그저 의학 지식만으로 감당할 수 없는 감정노동의 연속이었습니다. 그 시간들을 지나며, 나는 수없이 사직서를 썼고, 이 길이 나에게 맞지 않는 건 아닐까, 더 이상 감당할 수 없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하루하루 지날수록 나는 이 일을 더 진지하게 대하게 되었고,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나를 다시 일으켜 세우곤 했습니다. 돌아보면, 간호사는 단지 ‘생명을 지키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누군가의 고통을 가장 가까이에서 바라보고, 때로는 아무 말 없이 손을 잡아주며, 이름도 모르는 누군가에게 위로가 되는 존재였습니다. 그렇게 나는 간호사로서, 그리고 사람으로서 매일 조금씩 성장하고 있었습니다.
포기하고 싶었던 수많은 순간들을 지나며
간호사라는 직업을 오래 유지하는 데에는 분명한 이유가 필요합니다. 감정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소진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10년, 15년이 지나고 나면 더 이상 신입 때의 열정만으로는 버틸 수 없습니다. 25년을 이 자리에서 버텨낸 지금, 나는 그 이유가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수많은 동료들이 중간에 떠났습니다. 지쳐 쓰러졌고, 번아웃으로 인해 자신을 잃었으며, 어떤 이는 아이를 위해, 어떤 이는 건강을 위해 간호사라는 직업을 내려놓기도 했습니다. 나 또한 수십 번은 마음속으로 그만두고 싶었습니다. 응급 상황이 겹쳐 새벽 3시에도 침대에 누울 수 없던 날, 보호자의 고성이 무겁게 가슴을 내리치던 날, 내가 도대체 무엇을 위해 이 일을 하고 있는 건지 혼란스러웠습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누군가의 “고맙습니다” 한 마디가 다시 나를 붙잡았습니다. 출산 직후 생명이 위독했던 산모가 건강을 회복해 아이를 안고 웃던 모습, 암 투병 중 눈을 감기 전 내 손을 꼭 잡고 미소 지어 주던 노인, “선생님 덕분에 오늘 하루도 살았어요”라며 쪽지를 건네던 환자. 그런 순간들이 제게는 축복이었고, 제가 이 일을 계속해야만 하는 이유가 되었습니다. 간호는 기술이기도 하지만, 결국 마음을 다해 사람을 마주하는 일입니다. 정형화된 매뉴얼 속에서도 우리는 늘 ‘인간’을 봅니다. 그의 눈빛, 말투, 손의 떨림 하나까지 놓치지 않기 위해 애쓰며, 우리는 환자와 함께 울고 웃습니다. 그래서 이 일은 매일 새로운 시작이고, 매일 새롭게 나를 살아있게 만드는 이유가 됩니다.
나는 여전히 간호사이고 싶습니다
25년이라는 시간 동안 많은 것이 변했습니다. 병원의 시스템도, 의료 기술도, 근무 조건도 조금씩 달라졌습니다. 그러나 변하지 않은 것이 있다면, 간호사가 ‘사람의 마음’을 다루는 직업이라는 사실입니다. 환자의 아픔을 내 일처럼 받아들이고, 그들의 회복을 진심으로 바라는 마음. 그것이 바로 간호사의 본질이며, 내가 여전히 이 길에 남아 있는 이유입니다. 간호사로 살아간다는 것은 늘 긴장과 책임 속에서 살아가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만큼 보람도 큽니다. 생명이 회복되는 순간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볼 수 있다는 것은, 이 세상 어느 직업에서도 쉽게 얻기 어려운 경험입니다. 그리고 나 자신 또한, 그 시간들을 통해 더 단단해지고 더 따뜻한 사람이 되어갑니다. 이제는 후배 간호사들에게 말해주고 싶습니다. 때론 힘들고, 포기하고 싶은 순간이 오겠지만, 이 길은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당신의 손끝에서, 눈빛에서, 진심 어린 말 한마디에서 누군가는 살아갈 용기를 얻게 됩니다. 간호는 사람을 살리는 일이자, 결국 자신을 다시 살아가게 만드는 일이기도 합니다. 나는 오늘도 간호사입니다. 그리고 내일도, 여전히 간호사이고 싶습니다.